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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담(冒險談)은 ‘험함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뜻한다.
나에게 모험은 특별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흔들림·두려움·기대와 같은 감정들을 끌어안고 한 걸음을 내딛는 태도에 가깝다. 나는 그 감흥과 깨달음들을 자연물의 구조, 생(生)의 섭리와 순환의 이미지로 치환해 은유적으로 기록해 왔다.
화면 속 나뭇가지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이자, 스스로 그려가는 지도의 형태로 등장한다. 열매와 식물들은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품고 있으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결실과 질문, 성장의 순간들을 상징한다. 그 곁을 맴도는 나무늘보는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딛는 나그네로서의 나를 비유한 자아적 표상이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구축해 온 회화적 세계를 새로운 매체로 변주하는 시도이다. 한지에 층층이 쌓아올린 채색화가 오랜 시간과 이야기를 축적하는 방식이었다면, 수성목판화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틈, 생각의 파편을 토막토막 잘라 제시하는 단편에 가깝다. 각각의 판면이 하나의 리듬이자 작은 시구처럼 기능한다.
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이는 수성목판화(水性木版画)는 일본 전통 다색판화에서 유래한 기법으로, 물과 수성 안료, 한지를 사용하고 손으로 압력을 가해 인쇄한다. 안료를 판 위에 직접 조색해 올리는 과정에서 매번 달라지는 농도와 수분, 번짐의 정도는 한 번 찍힌 장면을 그대로 구현하기 어렵게 한다. 그래서 각 장(張)은 동일한 판에서 찍혀 나왔더라도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다.
판화 특유의 선명한 경계와 우연성은 내가 이번 작업에서 지향한 경쾌함과 간결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다양한 물성이 만들어내는 흔적들은 작가의 붓으로 통제되는 회화와 달리, 내면의 사유와 찰나의 감정들이 즉흥적 감각으로 전환된 과정을 보여주는 기법이 되었다.
나는 2017년부터 ‘느린 꽃놀이’ 연작을 이어오며 삶의 여정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해 왔다. 나뭇가지와 열매, 덩굴과 씨앗들은 매일의 걸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이자,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일상의 연속을 드러내는 은유였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흐름을 잇되, 회화에서 판화 및 오브제로 매체를 이동하며 사유의 결을 새롭게 드러내는 자리이다. 지난 작품 <모험담>(2024),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2024) 이후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개인적 성찰을 넘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화면 곳곳의 작은 단서들과 우연의 흔적을 따라가며 자신의 여정을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길 위에서 수집하고 간직한 작은 혼잣말들이, 또 다른 세계의 여정을 건너는 누군가의 또 다른 모험담과도 자연스레 맞닿을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